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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October 13, 2011
15호 수용소에서 내가 만난 사람들
   15호 수용소에서 내가 만난 사람들-정광일.pdf (175.0K) [10] DATE : 2012-04-24 16:33:28

15호 수용소에서 내가 만난 사람들
 
정광일, 15호 요덕 수용소 전 수감자
 
나는 1963년 중국에서 태어나 1968년 당시 중국이 문화혁명 동란으로 아버지가 북한 간첩으로 몰려 중국공안에 체포되어 감옥으로 가고, 우리 가족은 반혁명분자의 가족으로 탄압을 받자 어머니와 형제들을 데리고 북한으로 이주하였다. 북한으로 이주 후 거주 배치된 곳은 함경북도 회령 이였으며 초등학교와 고등중학교를 마치고 1979년 인민군에 입대하여 당시 인민군 5군단 74여단에서 군복무를 하였다. 내가 군복무를 한 곳은 군사분계선인 강원도 철원군 마장리였다.
 
1987년 군복무를 마치고 함경북도 청진시에 배치 받아 청진화학섬유공장 자재지도원을 1991년까지 하였다. 1992년 조선노동당 824연락소 지도원으로 임명 되여 평양시 형제산 구역에서 2년간 근무하다 1994년 824연락소 강원도 문천분소에 내려가 1996년까지 문천분소에 있었다. 1996년 말 조선노동당 제824연락소 청진분소 종합지도원으로 임명되어 1998년 10월까지 청진분소에 근무하다 1998년 11월 조선평양무역회사 청진지사장으로 임명받아 근무 중 1999년 7월 22일 간첩협의로 국가보위부에 체포되었다. 간첩이라는 이유는 내가 중국에 와서 한국 사람들과 접촉 했다는 것이었다.
 
간첩죄를 뒤집어쓰고 회령 보위부에 끌려갔다. 당시 5cm 굵기의 각목으로 마구 두들겨 맞아 뒤통수가 깨져 지금도 세 군데 상처가 있고 또 치아가 모두 부러져 중국에서 치료하기까지 4년을 이 없이 살았다. 그리고 보위부에서는 맞고 조사받고 맞고 조사 받는 일상이 반복되었다. 두 손을 뒤로 묶고 쇠창살에 수갑을 채운 상태에서 앉지도 서지도 못한 채 잠도 못자는 ‘비둘기 고문’ 등을 당하는 동안 체중 75kg이 35kg까지 줄었다.
 
또 탈북자들이 수감되는 보위부 지상과는 달리 정치범들은 지하에 수감되는데 화장실도 보내주지 않아 앉은 자리에서 용변을 보았다. 간수도 없고 아무리 소리를 쳐도 지상에서는 들리지도 앉아 살면 살고 죽으라면 죽으라는 식이었는데 그들은 ‘차라리 죽는 게 나을 테니 죽어라’고 말하기도 했다. 결국 나를 제외한 나머지 2명의 수감자는 죽고 나만 살아남았다.
 
살기위해 어쩔 수 없이 없는 죄를 시인하자 검사가 찾아와 조사를 시작했는데 그에게 억울함을 호소해도 보위부 조사관들과 검사는 미리 입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죄를 거짓 시인한 후 재판도 없이 그 길로 요덕수용소로 보냈다. 1999년 7월에 체포되어 2000년 3월까지 모진 고문을 받자 나는 내 스스로가 간첩이라고 승인을 하였으며 그로 인하여 요덕으로 보내졌다.
 
요덕에 도착하니 수 백 명이 수감자들이 있었고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고 있었다. 수감자들은 주로 북한에서 큰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이나 체제를 비판한 독일이나 중국 등의 유학생, 말 반동 등 정치범 들이었다.  처음 도착한곳은 독신자 혁명화구역 서림천이라는 곳이었다. 당시 서림천은 독신자구역이 아니었으나 강철환, 안혁이 폭로 하면서 위치를 옮겨 서림천으로 왔다고 보위원들이 이야기 하였다. 서림천은 1999년 11월에 생겼다고 하였으며 이전 백산이라는 구역에서 쓰던 농쟁기들을 가져다 놓은 것을 보고 알게 되었다.
 
처음 입소하여 도착한곳은 일명 외래반이라고 하는데 1개월간 수용소의 생활을 익히는 곳이었다. 대체로 정치범은 일반범과 달리 오랜 유치장 생활을 하여 허약할 대로 허약해 제대로 운신을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아침 5시에 기상하여 간단히 세수하고 밥을 먹고 6시부터 작업을 해야 하며 밥이래야 옥수수에 두부콩을 넣은 밥 한 그릇에 시래깃국 한 그릇이었다.

 
오전 작업은 12시까지 하고 12시부터 1시까지 점심식사를 하고 1시부터 저녁8시까지 작업을 하고 8시부터 9시까지 저녁식사를 마친 다음 저녁11시까지 정치학습을 시킨다. 주로 당의 유일사상체계 10대원칙을 공부 시킨다. 그날 학습과제를 외우지 못하면 다 할 때 까지 잠을 안 재운다.
 
수용소에는 때리는 것 이외에 합법적으로 수감자를 죽이는 방법이 있는데 바로 ‘굶겨 죽이는 것'이다. 수용소에서는 누군가를 죽이려면 일을 하기 힘든 밭에 보내 김을 매게 하는 등 어려운 일을 시켜 하루 작업량을 채우지 못하게 해서 식량배급을 주지 않아 결국 체력저하로 죽인다. 그리고 보통 보름을 가지 못해 죽는데 그것은 허약으로 죽은 것이지 맞아서 죽은 것이 아니고, 사유가 명백하기 때문에 어떻게 할 수 없다. 이로 인해 철저한 약육강식 세계가 성립되어 아버지가 아들 밥을 빼앗아 먹는 곳이 바로 요덕수용소이다.
 
요덕수용소에서는 강제노동을 당하는데 하루 노동량인 1인당 350평의 밭에 모두 김을 매면 600g의 식량이 배급되는데 노동량의 절반만 채우면 절반인 300g의 식량이 배급되었다. 작업량이 적으면 아예 식량이 배급되지 않았다.
수감자 대부분이 오랜 취조과정에 몸이 허약 할대로 한데다가 힘든 노동을 하니 견딜 수가 없어 하루 노동량을 채우지 못하여 먹지 못하여 영양실조로 죽었다. 4월부터는 기본적인 옥수수 농사를 짓는데, 옥수수 파종을 하면서 수감자들이 종자를 훔쳐 먹는다고 하여 종자에 인분을 버무려 파종을 하는데 수감자들이 너무 배가고파 종자를 훔쳐 물에 씻어먹고 대장염에 걸려 죽기도 하였다. 박경일 (남자 당시42살 전직 함흥시 흥남화학공자 노동자)은 인분을 버무려놓은 옥수수 종자를 먹고 대장염에 걸려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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